본문 바로가기

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23)
대학입시를 치르다 대학입시를 치르다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그 순간부터 또 큰일이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었거니와, 일을 벌일 만한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백수건달이 된 처지였다. 동생 춘근이는 수재라는 소문에 걸맞게 주위의 여망에 부응하였다. 그래서 무사히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집을 떠나고 없었고, 가정교사 자리까지 이미 마련되었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무엇을 할 것인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농고를 나왔으니까 그 동안 배운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멋지게 농사를 지을 법도 하였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우리 집 논밭 뙈기는 내가 거들지 않더라도 손이 철철 남아돌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 척박한 농토의 특성상 학교에서 배운 것..
복학과 졸업 복학과 졸업 장돌뱅이마냥 전국을 누볐다. 혼잣몸이란 이런 점이 편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면 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 먹으면 됐다.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쉬었다 가고, 그저 뜻한 바대로 나쁜 길 빼고는 모두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 편한 생활이었다. 게다가 수중에 돈도 지니고 있으니, 부러울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다니다 날이 저물면 먹고 자고, 날이 밝으면 다시 일어나 돈을 벌러 떠나는 나날이었지만 나는 그런 날의 무의미함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목기를 가득 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치고 있던 이유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천추의 한이었던 가난에서만 벗어나면 된다는 생각에서 영혼이 서..
목기 장사로 떠돌며 목기 장사로 떠돌며 지금은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보이지만, 나는 남보다 키가 크다고 할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작은 편이다. 더구나 체격도 건장하지 못하다. 다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얼굴빛과 피부가 매우 뽀얗다는 점이었다. 학교 수업만 끝나면 산으로, 들판으로 땔감을 하러 쏘다녔기 때문에 얼굴빛이 새카맣게 그을려 있어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까닭에 귀티가 흐른다는 말도 여러번 들었다. 아무튼 이런 용모는 목기 장사를 하는 데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이런 장사를 하지?” 깨끗한 보자기에 내 키보다 높이 봇짐을 꾸려서 두 가닥 하얀 멜끈으로 중간을 둘러서 짊어진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휴학계를 제출하다 휴학계를 제출하다 1954년 7월, 성하(盛夏)의 찬란한 태양이 빛나던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였다. 나는 결국 휴학계를 제출하고 학교를 나왔다. 일단 휴학계를 내고 보니 모든 것이 홀가분했다. 심적으로나 생활하는 데 보이지 않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혹시 학비에 도움이 될까 싶어 척박한 텃밭에 무와 배추를 심어 가꾸던 일도 할 필요가 없었고, 오리새끼와 병아리를 사다가 그것들을 키우느라고 애를 쓸 필요도 없었다. 지치고 허약한 몸을 잠시 쉬게 하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쉬는 일도 하루 이틀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여유로움은 점점 생활고의 압박으로 나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학비가 필요했다. 생활비도 필요했다. 병을 치료할 치료비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집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기대할 ..
토요일이 괴로웠던 까닭 토요일이 괴로웠던 까닭 “이재식, 뭐하러 나왔어 ‧ ‧ ‧ ‧ ‧ ‧.” 담임선생님의 고함과 함께 책가방이 창 밖으로 날아갔다. 책과 공책이 산산이 흩어지고 혹은 짖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른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토요일이 나는 가장 싫었다. 토요일은 이처럼 내 책가방이 창 밖으로 내팽개쳐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 형편에 등록금을 제때에 납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저 어쩌지도 못하고 무작정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 달이지, 반 년 치 혹은 3/4분기까지 밀려간다면 결국 곤욕을 치르는 것은 내가 아니고 오히려 담임선생님이셨다. 그래서 서무과에서 독촉을 받다 못한 선생님은 토요일만 되면 나더러 집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수업은 안 받아도 좋으니 집에 가서 등..
숨은 이야기 숨은 이야기 “이상하다. 간장에 왜 곰팡이가 자꾸만 피지? 물이 들어갔나‧‧‧‧?” 장독대 부근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혼잣말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이었는데도 이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 마음에 켕기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남의 집 울타리를 꺾어 불쏘시개로 썼던 것만큼이나 사리 분별이 없었던 또 하나의 일을 얘기하고자 한다. 숨은 그림 찾듯, 내 기억속의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더듬다가 찾아낸 어려운 시절의 딱한 이야기쯤으로 아무쪼록 널리 혜량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말이 자취 생활이지, 우리 형제가 사는 꼴은 도저히 말이 아니었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먹는 것을 해결하는 문제가 가장 큰 고역이었다. 그러나 반쯤은 영양실조 상태에서, 반쯤은..
불쏘시갯감이 가르친 것 불쏘시갯감이 가르친 것 자신있게 선생님을 안심시켜 드리기는 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쯤이면 떠돌아 다니는 곁방살이나 가난에 이력이 날 만도 했건만, 많지 않은 나이에 겪는 생활고는 매번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여기저기 듣보고 헤맨 끝에 다 쓰러져 가는 어느 집 뒷방 한 칸을 얻어 우리 형제는 자취를 시작했다. 또 다시 굶주리고 배를 곯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밥이고 뭐고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없는 사람에게 여름은 그래도 수월한 계절이다 추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큰 부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은 짧기만 했다. 선들선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지레 겨울나기를 걱정해야 했다. 없는 사람이 겨울을 나는 일은 더욱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노루 꼬리만 한 한낮이 휘익..
스승 최규진 선생님과의 만남 스승 최규진 선생님과의 만남 다시 시작된 남원에서의 새 생활은 비교적 그 출발이 순조로웠다. 후에 남원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내신 최규진 선생님께서 우리형제를 딱하게 여기셨던지 이리저리 마음을 써서 보살펴 주신 덕분이었다. “이재식, 교무실로 오너라.”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한 게 있나 곰곰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학창시절에 교무실로 불려가는 것은 그렇게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적미적하며 교무실로 들어서자, 선생님께서 대뜸 물으셨다. “이재식, 요즘 어디서 지내나? 동생도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던데 ‧ ‧ ‧ ‧ ‧.” “그럭저럭‧ ‧ ‧ ‧ ‧ 아는 친구집 자취방에서‧ ‧ ‧ ‧ ‧.” “예‧ ‧ ‧ ‧ ‧.” 면구스럽고 부꾸러워 고개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