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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숨은 이야기

 

 숨은 이야기

 

    “이상하다. 간장에 왜 곰팡이가 자꾸만 피지? 물이 들어갔나‧‧‧‧?” 장독대 부근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혼잣말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이었는데도 이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 마음에 켕기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남의 집 울타리를 꺾어 불쏘시개로 썼던 것만큼이나 사리 분별이 없었던 또 하나의 일을 얘기하고자 한다. 숨은 그림 찾듯, 내 기억속의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더듬다가 찾아낸 어려운 시절의 딱한 이야기쯤으로 아무쪼록 널리 혜량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말이 자취 생활이지, 우리 형제가 사는 꼴은 도저히 말이 아니었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먹는 것을 해결하는 문제가 가장 큰 고역이었다. 그러나 반쯤은 영양실조 상태에서, 반쯤은 정신력으로 하루하루를 이렇게 저렇게 겨우 버텨 나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식량이 생길 때가 있었다. 집에서 보다 못해 얼마간 먹을 것을 갖다 주는 때였다. 식량이라고 해야 기껏 보리나 조, 감자와 같은 잡곡이었지만, 그것은 청나라 궁중 연회요리라고 하는 만한전석(滿漢全席)과도 바꾸지 않을 긴하고도 소중한 먹거리였다.

 

    문제는 반찬이었다. 줄곧 맨밥으로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언가와 곁들여 먹어야 했지만 그것이 맹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긴 했다. 다름 아닌 소금이다. 밥 한 숟가락 떠 넣고 소금 좀 찍어 먹고, 밥 한 숟가락 더 넣고 다시 소금 좀 찍어 먹는 식으로 곁들이기는 했으니 말 이다. 그러나 소금에 찍어 먹는 밥을 먹을 때는 간간하니 그런 대로 넘길 만하지만, 먹고 난 다음이 항상 말썽이었다. 기름기 한 점 없는 위장 벽을 소금기가 파고드는지 도려내는 듯 속이 쓰리고 복통이 나며 메스껍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문득 주인집 장독대에 있던 간장독을 떠 올렸다. 한 항아리 가득 든 간장인데 한 숟가락쯤 떠먹는다고 해서 무슨 표시가 날까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마침내 간장 한 숟가락을 푹 떠서 밥에다 비벼 먹는다. 그 때의 그 맛을 과연 어디에다 비교할 수 있을까. 달짝지근하고 달곰삼삼한 맛이 오늘날 쇠불고기 국물에 비벼 먹는 맛도 그만큼은 아닐 성 싶다. 아무튼 소금에 다 밥을 먹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더구나 조족지혈(鳥足之血)정도로서 커다란 장독에서 숟가락으로 덜어내는 것이니 표시가 나지도 않을 일이었다. 나는 아주 은밀하고도 감쪽같이 일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어긋났다. 문제는 숟가락에 있었다. 물기 하나 없이 보송보송한 도구로 간장을 떠내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물 묻은 숟가락으로 한 번, 두 번 간장을 떠내다 보니 어느 새 간장독에 곰팡이가 하얗게 신호를 보내게 되었고, 그 날 새벽녘에 주인 아주머니가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아주머니가 추궁을 하기라도 하면 나는 그만 모든 것을 이실직고할 것 같았다. 그러면 그 얼마나 면목없고 미안한 일이겠는가. 나는 그 날 종일을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보냈다. 사람은 항상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 이후로 나는 내 잘못 때문에 두려움에 떨거나 눈치를 살피는 일은 애초부터 만들지도 생각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