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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목기 장사로 떠돌며

 

목기 장사로 떠돌며

 

   지금은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보이지만, 나는 남보다 키가 크다고 할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작은 편이다. 더구나 체격도 건장하지 못하다. 다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얼굴빛과 피부가 매우 뽀얗다는 점이었다. 학교 수업만 끝나면 산으로, 들판으로 땔감을 하러 쏘다녔기 때문에 얼굴빛이 새카맣게 그을려 있어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까닭에 귀티가 흐른다는 말도 여러번 들었다. 아무튼 이런 용모는 목기 장사를 하는 데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이런 장사를 하지?”

 

    깨끗한 보자기에 내 키보다 높이 봇짐을 꾸려서 두 가닥 하얀 멜끈으로 중간을 둘러서 짊어진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손에는 광택이 가장 좋은 견본 한두 개를 들고 떡하니 길을 나서면, 용모와 물건이 제법 잘 어울려 신뢰도를 높여주는 것 같았다. 잇속만 차리려는 약삭빠른 사람이 아닌 선량한 얼굴의 학생이 파는 진짜 지리산 목기라는 그런 종류의 신뢰도 말이다.

 

    목기는 날개가 돋친 듯 잘 팔려 나갔다. 시련 속에서 희망과 기쁨은 더 크게 피어나는 법이다. 대학 입시를 한 학기 남겨두고 가난에 못 이겨 휴학계를 내고는 한때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우려를 했었다. 그러나 목기 장사가 의외의 좋은 성과를 거두자, 그와 함께 내 모든 근심과 걱정도 말끔히 해소되는 듯했다. ‘고학의 길을 택하고 나선 나에게 목기 봇짐은 나의 간절한 꿈과 소망의 원천이었다. 태산같이 높게 쌓아올린 목기더미가 내게는 곧 희망의 봇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꿈과 소망에 대한 희망이 보이자 나는 용기가 솟아 올랐다.

 

    요즘같이 고급의 다양한 재질로 만든 제품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예쁘게 깍아서 잘 색칠해 놓은 목기는 부잣집 아낙네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호의 대상이었다. 또한 놋그릇처럼 매번 짚수세미로 문질러 닦아서 윤을 내야 하는 수고도 필요 없었으며, 니켈이나 크롬 따위의 함유량이 적어서 쉬 녹이 슬었던 스테인리스 그릇에 비해 품위도 있어 보이고 모양도 갖가지여서 어디를 가든지 큰 인기를 모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경북 울진군 죽변으로 기억되는데, 집들이 깨끗한 어촌이었다. 줄지어 서 있는 집들의 모습에서 선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부자 동네임을 한눈에도 짐작할 수 있는 곳이었다. 뙤약볕 아래로 힘겹게 목기 한 봇짐을 지고 가다가 골목 어귀에 짐을 부려 놓은 채 땀을 닦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양가집 규수와 같은 예쁜 아가씨가 말을 걸어왔다. 나이로 보면 나와 큰 차이가 없을 듯 했지만, 매무새를 곱게 단장한 탓인지 그 귀태에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나도 부자 부모님을 만났더라면 이 한여름에 비오듯 땀을 흘리며 이런 봇짐을 지고 다니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까닭 모를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공연스레 모멸감이 느껴지고 객쩍은 분개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 막연한 적개감이 나도 모르게 엉뚱하게 분출되었다.

, 이거 파는 거예요?”

팔려니까 가지고 다니지요.”

그래요. 정말 예쁘네요. 저 찬합은 얼마나 해요?”

그거, 아주 비싸요.”

그럼요, 비싸겠지요. 이렇게 좋은 물건이니 어떻게 비싸지 않겠어요?

그리고 얼굴을 보니까 고급스런 물건만 취급하실 것 같고요.“

그거 5,000환입니다.”

“5,000환요? 그럼 괜찮네요. 그거 주세요.”

 

    나는 깜작 놀랐다. 순간 귀와 눈을 의심했다. 사실 그 찬합은 500환짜리였었다. 그 여자와 내 처지가 천양지판(天壤之判)으로 비교가 안 될 만 큼 차이가나는 것 같아 분괴(憤愧)한 마음에서 그냥 불러본 값이었는데, 두 말 않고 돈을 건네주는 것이다. 그리고 소문이 어찌 났는지, 곧이어서 많은 부인네들이 줄을 지어 나와 경쟁적으로 목기를 사기 시작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파는 행위가 어찌 생각하면 공평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부잣집에서 가난한 고학생 돕는 셈 치면 큰 무리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나의 행동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정당화시키기에는 여러 가지로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올바르지 않은 돈벌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후회가 앞섰다. 근본적인 문제는 돈 몇 푼에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감정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는 일이었다. 장사가 궁극적으로 경제적 이윤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라 해도, 그 이유로 모든 것이 용납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장사하는 일보다 더 큰 일에는 무엇을 속일 것인가 하는 자책과 반문이 끊임없이 나를 질타하였다.

 

    오늘날 각종 사건과 사고 들로 혼란한 우리 사회 상황이나 쟁의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노동계의 문제도 다지고 보면 개인의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게 그 근본적인 까닭일 것이다. 올바른 방법에 의한 이윤 창출만이 진정으로 값진 물질이 된다는 경구를 평생에 새길 수 있었던 목기 장사를 했던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 아니 간 데 없이 다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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