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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대학입시를 치르다

 

대학입시를 치르다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그 순간부터 또 큰일이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었거니와, 일을 벌일 만한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백수건달이 된 처지였다. 동생 춘근이는 수재라는 소문에 걸맞게 주위의 여망에 부응하였다. 그래서 무사히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집을 떠나고 없었고, 가정교사 자리까지 이미 마련되었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무엇을 할 것인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농고를 나왔으니까 그 동안 배운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멋지게 농사를 지을 법도 하였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우리 집 논밭 뙈기는 내가 거들지 않더라도 손이 철철 남아돌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 척박한 농토의 특성상 학교에서 배운 것을 시험할 만한 특별한 작물도 없었다. 더욱이 농사를 짓는 일은 왠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큰 전답을 지니고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누대로 물려받은 가산이 있는 것은 더욱 아니며, 특별하게 기술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닌 처지에 내가 과연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유능한 사람이 되어서 많은 곳에 쓰임을 받을수 있는 역량과 자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중요한 것은 학비 마련이었다. 아무리 뜻이 훌륭하고, 꿈이 크더라도 이를 뒷받침해 줄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작은 형님인 재호(在鎬) 형과 의논하여 얼마 동안이라도 좋으니 남원으로 이사를 가자고 권유하였다. 남원만 해도 그 당시는 도회지격인 곳이었으므로 무언가 활로가 마련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마침내 어머니를 모시고 남원으로 나온 세 식구는 동문 밖에 두 평자리 가게 하나를 얻어 찐방 장사를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보자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문을 연 가게였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진빵 장사 역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장작불을 때는 데도 익숙치 못하여 가게 안을 마치 오소리 잡는 굴처럼 만들어 놓기가 일쑤였다. 그런 상태에서 만들어내는 찐방이니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나는 안되겠다 싶어 진빵 장사는 어머니께 맡기고 작은 형님과 함께 장작 장사를 시작했다. 연탄이나 석유, 가스 등이 난방 연료로 이용된 것은 그 한참 후의 일이었고, 솔가리나 땔나무 등이 주로 난방 재료로 이용되던 때였으므로 당시 장작은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품으로서 꽤 유망한 장사 품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형제는 군부대에서 후생사업을 하는 트럭을 한 대 빌려 고향인 번암과 지리산 언저리에까지 들어가 나무를 했다. 그리고 나무를 한 차 실어다가 빈 밭에 부려놓고 이를 팼다. 장작 패는 일의 고달픔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손에 금방 물집이 잡히고, 몇 번만 내리쳐도 힘에 겨워 도끼가 제대로 올라가질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대학을 가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들어도 멈출 수 없었다. 하여튼 그렇게 팬 장작을 작은형과 함께 지게에 지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익이 조금 남았다.

 

    그렇지만 건강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매일 밀가루 수제비와 감자쪽으로 끼니를 때우고 무리한 일을 했으니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가끔은 수제비와 감자 냄새에 진력이 나서 알고 지내는 미곡상 아주머니께 외상으로 보리쌀을 팔러 갔다. 그럴 때마다 아주머니는 보리쌀 반 됫박을 내주면서 싫은 표정을 얼굴에 역력하게 나타내었다.

 

    가난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하고 눈총 받는 그런 신세가 가난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이를 악물었다 목표가 정해진 이상, 그 어떤 괄시나 업신여김도 내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고생을 하는 이유는 대학 진학이었고, 이제 그것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진빵 장사, 장작 장사로 겨울 내내 뛰면서 나는 당시 이리에 있던 국립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과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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