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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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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농고 입학과 두 번째의 남원 생활 남원농고 입학과 두 번째의 남원 생활 그해 겨울은 모든 것이 암울하고 막막하기만 한 나날들이었다. 게다가 두메산골의 겨울은 턱없이 길기만 하여 춘삼월이 다가오는데도 매서운 날씨는 좀처럼 풀릴 줄 몰랐다. 이곳 장수군은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전라북도 내에서도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가장 심하며, 서리가 가장 빨리 내리고, 계절풍의 내왕이 잦아 비와 눈이 많이 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마을의 집들은 거개가 지푸라기 대신 갈대나 억새풀의 줄기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인, 건새 지붕의 집들이었다. 그런 건새집들은 지불이 두텁고 물매가 가팔랐다. 그것은 비나 눈ㄴ을 빨리 흘려 내리기 위한 지혜였다. 또한 볏짚으로 이엉을 해서 덮은 초가는 해마다 새로 지붕을 이어야 하는 반면, 건새로 이은 지붕은 쉽게 ..
첫 고배를 마시다 첫 고배를 마시다 나는 하릴없는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모르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이든 의지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손쉽게 해결되는 줄로 믿고 있었다. 전주고등학교에 지원한 것 역시 그런 안일한 생각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나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은 크고 넓었으며,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도 매우 많았다. 전북 최고의 명문교답게 전주고등학교에는 내 노라 하는 수많은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한결 같이 도내의 각 군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특출하고 탁월한 우등생들이었다. 남원중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12명이 응시했다. 우리들 역시 학교에서 손꼽힐 만큼 우수한 학생들이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지만, 나는 입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내 인..
가정교사로 지낸 중학시절 가정교사로 지낸 중학시절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시다. 결코 어떤 한 사람을 철저히 외면하여 나락의 늪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저마다 그 자신의 능력에 맞게 기회를 부여해 주신다. 그 기회를 포착하느냐, 못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기회가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남들 같으면 몇 년에 걸쳐 했을 고생을 중학교 1년 동안 소리없이 감수한 반대급부라고나 할까, 어떻든 뜻밖의 무지개빛 행운이 나에게로 다가온 것이다. 기나긴 겨울방학이 긑나고 도 다시 고난의 현장 남원으로 떠나야 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앞으로 지낼 시간들이 암담하기만 했다. 내 사정이 전혀 개선되지 않아 숙식 문제는 여전히 큰 근심거리였다. 그런데 그때,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말하자면 머..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나날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나날 1949년 3월, 우리 집의 가장 큰 재산이었던 소를 팔아 마침내 나는 남원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진학을 하여 공부를 계속하길 바랐던 그때까지의 소원은 일단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나에겐 또 다시 고난의 날이 시작되었다. 중학교 입학 등록금만 대주시면 나머지는 모두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건만, 세상살이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기거할 집이 있어야 했고, 먹을 양식이 있어야 했으며, 읽고 쓸 책과 학용품, 그리고 입고 다닐 교복이 있어야 했는데 나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학생이 되었다는 기쁨도 순간뿐이었고, 나는 다시 이 고달픈..
가난살이의 합격통지서 가난살이의 합격통지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타고난 궁핍함은 어린 나에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며칠 뒤, 터덜터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학교로 갔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자 반색을 하며 맞아주셨다. “여어, 재식이구나. 너 합격했더라.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담임선생님이 건네는 축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대답 대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들짐승, 날짐승에 이리저리 쫒기면서 태령의 그 험한 산길을 맨발로 넘고 또 넘기를 6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시냇물을 마시고, 산열매를 따먹으며, 생가재를 잡아먹기를 또 그만한 시간만큼 했다. 그런데 그 모진 고생의 결과가 그 합격통지서 한 장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너무 어이없고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 2 부 시련의 남원 진출 제 2 부 시련의 남원 진출 남원중학교 시험을 치르고 당시 장수군 내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가려면 어찌할 도리 없이 남원읍으로 나가야만 했다. 집에서 남원까지는 대략 28km의 70리 길이었다. 그러므로 설사 합격을 한다 해도 통학을 하기엔 너무 먼 길이었고, 그렇다고 하숙을 하기엔 집안 형편상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뚜렷한 대책도 없이 단지 막연히 배워야 한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간 것이다. 장수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학교가 과히 많지 않던 시절이라 남원 중학교에는 인근 지역으로부터 많은 응시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경쟁률이 무려 4대 1이나 됐다. 나는 온종일을 쫄쫄 굶어 ..
나는 공부하고 싶다 나는 공부하고 싶다 누르데데하고 혹은 거무튀튀하기도 한 폐지 재생지인 막종이로 만든 공책에, 엄지손가락 한 미디도 안 되는 몽당연필, 이는 당시 학용품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우개가 없어 침을 묻혀 틀린 글자를 지우다 보면 그대로 구멍이 뚫려버리기도 하는데, 그 때의 허탈감과 무안함이란....... 그러나 그 정도에 좌절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공부를 해야만 했고, 그것도 대단히 열심히 해야만 했다. 어쩌면 공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도 대단히 열심히 해야만 했다. 어쩌면 공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 해도 좋았다. 마치 남보다 못한 환경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나는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1949년 3월 20일, 번암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나는 전교 회장으로서 도..
관솔불과 호롱불 사이에서 관솔불과 호롱불 사이에서 “재식아, 기름 좀 내오너라.” 어스레한 저녁녁 별이 채 뜨기도 전에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면 어느새 온 천지는 암흑으로 캄캄해진다. 그러면 영락없이 이러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나는 부리나케 헛간으로 달려가 짚더미 속에 감춰놓은 석유병을 확인하며 얼마를 덜어야 할지 머뭇머뭇 어쩔 줄을 모른다. 그 당시 면소재지에는 금광이 있어 이미 전깃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산골 오지의 우리 마을 성암리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전깃불은 고사하고 호롱불을 켤 석유마저 제대로 구할 수 없었고 석유를 태울만한 사정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살아야 할 따름이었다. 그 런데 공부를 하던 내게 이러한 상황은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숙제와 예습, 복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