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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불쏘시갯감이 가르친 것

불쏘시갯감이 가르친 것

 

    자신있게 선생님을 안심시켜 드리기는 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쯤이면 떠돌아 다니는 곁방살이나 가난에 이력이 날 만도 했건만, 많지 않은 나이에 겪는 생활고는 매번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여기저기 듣보고 헤맨 끝에 다 쓰러져 가는 어느 집 뒷방 한 칸을 얻어 우리 형제는 자취를 시작했다.

 

    또 다시 굶주리고 배를 곯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밥이고 뭐고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없는 사람에게 여름은 그래도 수월한 계절이다 추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큰 부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은 짧기만 했다. 선들선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지레 겨울나기를 걱정해야 했다. 없는 사람이 겨울을 나는 일은 더욱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노루 꼬리만 한 한낮이 휘익 지나가고 나면 길고 긴 겨울밤을 맞아야 한다. 밤새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기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형제는 사시사철을 이불 한 채 없이 버티어 냈다. 차디찬 냉방에서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새우같이 몸을 웅크려 잠을 청하곤 했다. 참으로 모진 게 사람의 목숨이었다. 그 지경에 이르러도 병 한 번 걸리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 같은 역경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강인한 근성을 심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극빈하게 사는 생활이라고 해도 어찌 되었든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했다. 그래서 방과 후에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것이 당시 내 주요 일과 가운데 하나였다. 주인 집의 낡은 망태기와 기다란 지게 막대기를 가로 메고, 녹슨 낫 하나를 달랑 들고는 왕치면 뒷산을 올랐다. 거리가 3-4km나 되는 솔찮은 걸음이었다. 그래서 나무 뿌리를 캐어 땔감을 마련해 오면 어느새 날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부랴부랴 서둘러 겨우 밥을 해먹고 나도 시각은 이미 한밤중이 되곤 했다. 그때서야 기니를 때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그런 늦은 저녁을 먹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을 지피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을 지피기 위해선 오리나무 뿌리가 특히 좋았다. 불땀도 좋거니와 낫질이 용이했다.

 

    동생과 나는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나무를 했지만, 언제나 마음에 들만큼 넉넉하게 해오지는 못했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이면 그 곤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또한 축축하게 젖은 나무에 불이 붙을 리 없었다. 연기만 하얗게 피어 오르다가 그대로 사그라들곤 했다.

 

    그때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 있었다. 울타리였다. 옛날 대개의 시골집들은 대체로 싸릿대 따위를 얽거나 엮어서 울타리를 쳤다. 우리가 지내고 있던 그 집 역시 담장 대신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그것도 불쏘시갯감으로 최고로 좋다는 소나무 가지 울타리였다. 나는 살그머니 울타리로 다가가 바짝 마른 울타리 솔가지 몇 개를 똑똑 끊어냈다. 그러면 금세 한 움큼씩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불을 지피면, ‘화르르르불꽃이 피어 오르는 것이 예상했던 것처럼 불땀이 아주 셌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잘라다 써버릇하니 나중에는 이골이 났다. 사람이 편리한 것에 길이 들어 익숙해지면 나태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제 편리한 것만 생각하느라 사리를 분별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게을러졌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도 으레 불쏘시개를 등한히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밖에서 주인집 할아버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부르는 것이다.

학생, 학생 있어?”

예에, 왜 그러세요?”

이리 좀 잠깐 나와 봐.”

주인집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울타리 쪽으로 갔다.

학생, 이상한 일이야.”

무슨 일인데요?”

울타리가 자구 성글어져.”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뗐다.

간밤에 바람이 많이 불더니 떨어져 나갔는가 봐요.”

그래서 그런가 ‧ ‧ ‧ ‧ ‧.”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어서 그랬는지, 미심쩍긴 하지만 속아주기로 작정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치 얼굴에 모닥불을 끼얹은 듯 부끄러웠다.

 

    나는 그때 배움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의 몸이 고달프다고해서, 조금 편해지고자 해서 옳지 못한 행동을 저지른다면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한 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못 배운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고 나 자신을 질책하였다. 그 동안 도리를 가리지 못한 행동들이 부끄럽기만 했다.

 

    나는 울타리 솔가지를 꺾어다 불쏘시개로 쓰는 일을 중단했다. 춥더라도 냉방에서 그냥 자기로 했다. 배가 고파도 차라리 굶기로 했다. 그것이 무엇보다 떳떳한 일이며, 진정으로 배운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후로 그때의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내남없이 모두 어려운 때일수록 정의로운 양심이 더욱 발휘되어야 한다. 배움의 깊이와 정도를 떠나서 일의 도리와 가치를 분별하는 도덕적 의식이야말로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종요로운 덕목이 되어야 하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 나를 삼가고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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