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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휴학계를 제출하다

휴학계를 제출하다

 

    1954 7, 성하(盛夏)의 찬란한 태양이 빛나던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였다. 나는 결국 휴학계를 제출하고 학교를 나왔다. 일단 휴학계를 내고 보니 모든 것이 홀가분했다. 심적으로나 생활하는 데 보이지 않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혹시 학비에 도움이 될까 싶어 척박한 텃밭에 무와 배추를 심어 가꾸던 일도 할 필요가 없었고, 오리새끼와 병아리를 사다가 그것들을 키우느라고 애를 쓸 필요도 없었다. 지치고 허약한 몸을 잠시 쉬게 하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쉬는 일도 하루 이틀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여유로움은 점점 생활고의 압박으로 나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학비가 필요했다. 생활비도 필요했다. 병을 치료할 치료비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집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내가 발벗고 나서야 될 일들뿐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매우 잘하던 동생 춘근이의 앞날도 형이 된 입장에서 뒤를 돌보아 주어야 할 일이었다. 동생에게도 나와 같은 좌절감을 맛보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래야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다. 자칫 휴학이라는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그 동안의 공든 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해야 했다. 특히 돈벌이가 되는 일이면 더욱 좋았다. 당시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학비와 생활비, 즉 공부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장수군에는 두 가지 특산물이 있다. 돌과 나무가 그것이다. 지리적으로 깊은 두메산골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 두 가지는 천연적으로 가장 흔한 것이기도 했지만, 일찍이 이를 이용하여 만든 가공품이 솔찮은 수입이 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한 가지는 질좋은 곱돌을 캐다가 솥, 냅비, 약탕관, 절구통 등의 곱돌그릇을 만들어 파는 일이요, 다른 한 가지는 인접한 지리산의 좋은 오리나무를 베어다가 쟁반, 찬합, 밥통, 제기(祭器) 같은 목기(木器)를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그러나 곱돌그릇은 너무 무겁고, 또한 만드는 양이 제한된 데다 일종의 특산물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취급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목기는 종류도 다양한 데다 가벼워서 다루기가 쉬웠고, 또 생활에 널리 활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익이 많이 남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누구보다 성실한 학생이며, 열심히 공부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몇몇 동네 아주머니 역시 나에게 목기 장사를 권했다. 내 체격이나 덩치로 보아 곱돌그릇 장사보다는 훨씬 나을 거란 말씀이었다.

 

    그렇지만 장사를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밑천이란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밑천은 고사하고, 몸이 아파도 약을 살 돈조차 없는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아주 신통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차피 누군가에게 돈을 변통 할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전후 사정을 말씀 드리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나와 동생이 학업을 게속하기 위해 매우 절실한 문제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그리고 잘하면 집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것만큼은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밑천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약간의 돈을 마련해 주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남원농업고등학교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지리산 목기 장수로 탈바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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