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관솔불과 호롱불 사이에서

관솔불과 호롱불 사이에서

 

    “재식아, 기름 좀 내오너라.”

어스레한 저녁녁 별이 채 뜨기도 전에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면

어느새 온 천지는 암흑으로 캄캄해진다. 그러면 영락없이 이러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나는 부리나케 헛간으로 달려가

짚더미 속에 감춰놓은 석유병을 확인하며 얼마를 덜어야 할지

머뭇머뭇 어쩔 줄을 모른다.

 

  

   그 당시 면소재지에는 금광이 있어 이미 전깃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산골 오지의 우리 마을 성암리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전깃불은 고사하고 호롱불을 켤 석유마저 제대로 구할

수 없었고 석유를 태울만한 사정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살아야 할 따름이었다. 

런데 공부를 하던 내게 이러한 상황은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숙제와 예습, 복습 등을 해야 하는데 불이 없으니 글자 하나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생각다 못해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관솔을 따다가

불을 붙여놓고 그 불빛에 공부를 했었다. 그런데 관솔불의

가장 큰 단점은 그 불을 매달 수 없는 데 있었다.

불이 놓인 그 주위만 조금 밝을 뿐 빛이 흐렸기 때문에

글자가 어리어리하였고, 그래서 불 가까이에 다가 앉으면

불똥이 튀어 책에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십상이었다.

반딧불에 글을 읽고, 눈빛에 공부를 했다는

형설(螢雪)의 공()이 내게는 결코 허언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하였다.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고심한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집에 있는 콩이나 팥을 한

됫박쯤 짊어지고 함양의 장터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함양까지는 왕복 32km, 그러니까 무려 80리 길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발걸음도 가볍고 수많은 고개를 넘어도

힘이 드는 줄 몰랐다. 그것을 팔면 4홉들이 막소주

대병에 석유를 가득 받을 수 있었고, 그러면 환한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닭 한 마리를 가슴에 품고 10km쯤 떨어진

인월장터로 가서 석유를 바꿔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께서는 밤만 되면

석유를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럽고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생활을 위해서는 기꺼이 석유를 내놓아야 마땅했다.

왜냐면 밤이 늦도록 어머니나 아버지께서는 길쌈을

하거나 새끼를 꼬곤 하셨는데, 불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길쌈은 우리 집안의

생계와 직결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부가 당장 큰 벌이는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같은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

데 너무도 필요한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런 내 속사정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다.

 

어쨌든 아버지의 명이니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내미는 호롱불에 석유를 찔끔 따라

드리고 말았는데, 그것마저도 얼마나 아까웠는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재식아, 기름 좀 내오너라 하는 아버지의 명령 빈도가

점점 많아지면서 나의 절망감도 그에 비례해서 한층

깊어졌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 부 시련의 남원 진출  (0) 2021.10.03
나는 공부하고 싶다  (0) 2021.10.01
태령, 그 저편의 기억  (0) 2020.05.23
점심 도시락  (0) 2020.05.17
8 ‧ 15 해방이 내게 준 교훈  (0) 2020.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