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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나날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나날

 

    1949 3, 우리 집의 가장 큰 재산이었던 소를 팔아 마침내

나는 남원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진학을 하여 공부를 계속하길 바랐던 그때까지의 소원은

일단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나에겐

또 다시 고난의 날이 시작되었다.

중학교 입학 등록금만 대주시면 나머지는 모두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건만, 세상살이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기거할 집이 있어야 했고,

먹을 양식이 있어야 했으며, 읽고 쓸 책과 학용품,

그리고 입고 다닐 교복이 있어야 했는데 나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학생이 되었다는 기쁨도 순간뿐이었고,

나는 다시 이 고달픈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처음 얼마간은 아는 선배의 자취방에 얹혀 더부살이를 하였다.

그래도 시골 인심이라 같은 고향에서 왔다는 후배를 어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예 붙좇아 살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그 선배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재식아, 집에서 보급이 그렇게 오지 않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 ‧ ‧ ‧ ‧.”

 

    나는 유구무언(有口無言). 그야말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보급이란 당시 생활비를 일컫던 말이었다.

아버지와의 약속도 약속이었지만, 설사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집안 형편에 생활비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너랑 함께 생활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렇다고 그 선배를 야속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해방 이후 농촌의 형편이란 것이 조금 덜 하느냐,

더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너나 나나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자기 혼자 살아도 빠듯한 생활에 나까지 붙살이를 하였으니

선배 입장에서도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면목 없고 미안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마침내 보따리를 싸들고 선배의 자취방을 나왔다.

 

    그러나 막상 나오긴 했지만, 마땅하게 어디로 갈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늘에는 무심한 뭉게구름만 두둥실 흘러가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모두 분주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만 단지 갈 곳을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혈혈단신의 외로운 고아도 아니면서,

그 넓은 세상 어디에도 내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었다.

지독한 고독함으로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았다.

 

    ‘내가 왜 객지에 나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

나는 왜 중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가,

이렇게 공부해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해가 뉘엿뉘엿 서녘으로 넘어가 제법 어슴푸레할

때까지 나는 학교운동장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골똘히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절망감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사방이 온통 칠흑으로 덮여가고 있을 때,

나는 이윽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그래, 나는 이겨야 한다. 이까짓 고난쯤이야 두렵지 않다.

지금 겪는 고통만큼 더욱 열심히 공부하자.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다.”

 

    그날부터 나는 이 친구, 저 친구 집으로 며칠씩 떠돌면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중학생활을 시작했다.

아마도 평생을 통해 가장 고단하고 혹독하게 생활의

고통을 겪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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