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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제 2 부 시련의 남원 진출

 

 2 부 시련의 남원 진출

 

남원중학교 시험을 치르고

 

당시 장수군 내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가려면 어찌할

도리 없이 남원읍으로 나가야만 했다. 집에서 남원까지는 대략

28km 70리 길이었다.

그러므로 설사 합격을 한다 해도 통학을 하기엔 너무 먼 길이었고,

그렇다고 하숙을 하기엔 집안 형편상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뚜렷한 대책도 없이 단지 막연히 배워야 한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간 것이다.

 

장수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학교가 과히 많지 않던

시절이라 남원 중학교에는 인근 지역으로부터 많은

응시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경쟁률이 무려 4 1이나 됐다.

나는 온종일을 쫄쫄 굶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시험을 쳤다.

관솔불 밑, 호롱불 밑에서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모든 것들을 탈탈 쏟아 놓았다.

그리고 후회 없이 시험을 끝냈다.

 

이재식, 시험 잘 쳤어?”

, 잘 쳤습니다.”

아암, 그래야지. 아무리 환경이 어렵다 하더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거야.

그것이 인간이 어느 동물과 다른 점이야. 알겠어?”

, 잘 알겠습니다.”

우리집 형편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계시던 초등학교 임환갑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격려하며 하시는 말씀이었다.

 

나는 시험을 치고 온 다음 날부터 때 없이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면 태령 중턱에 올라가 공연히 고함을 질러보기도 하고,

돌멩이를 집어 들고 언덕 저편으로 멀찍이 던져보기도 했지만,

가슴 속에 꽉 들어차 나를 짓누르던 응어리는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바로 입학 등록금이 문제였다.

집안 형편을 너무나 빤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등록금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아버지와 큰형님이 염려스레 주고 받던 말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재식이와 춘근이는 좀 가르쳐야 될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두 녀석 모두 재주가 있는데, 형편이 이 모양이니‧‧‧‧‧.”

‧‧‧‧‧‧‧.”

 

어쩌면 내가 불우한 비진학 청소년이나 근로 청소년,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문맹자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리라고

다짐을 한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난 때문에, 건강 때문에 혹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사회에 진출하여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사회 개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려면 그래도 배움의 정도를

더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