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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남원농고 입학과 두 번째의 남원 생활

 

남원농고 입학과 두 번째의 남원 생활

 

    그해 겨울은 모든 것이 암울하고 막막하기만 한 나날들이었다. 게다가 두메산골의 겨울은 턱없이 길기만 하여 춘삼월이 다가오는데도 매서운 날씨는 좀처럼 풀릴 줄 몰랐다. 이곳 장수군은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전라북도 내에서도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가장 심하며, 서리가 가장 빨리 내리고, 계절풍의 내왕이 잦아 비와 눈이 많이 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마을의 집들은 거개가 지푸라기 대신 갈대나 억새풀의 줄기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인, 건새 지붕의 집들이었다. 그런 건새집들은 지불이 두텁고 물매가 가팔랐다. 그것은 비나 눈을 빨리 흘려 내리기 위한 지혜였다. 또한 볏짚으로 이엉을 해서 덮은 초가는 해마다 새로 지붕을 이어야 하는 반면, 건새로 이은 지붕은 쉽게 썩지 않아서 약 3040 년 쯤은 유지가 되었다. 그래서 건새 초가지붕에는 흔히 기와지붕에서 볼 수 있듯, 시퍼렇고 두꺼운 이끼가 덮여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초가집 모양이 마치 일본 농가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두툼하고 물매가 가파른 일본 농가의 지붕과 흡사한 이요 때문에 그곳이 혹시 일본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곳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왜적의 패잔병이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면서 짓기 시작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오기도 하는데, 그런 말들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해방이 되면 좀 나아지겟지 하고 기대했던 가난한 생활의 어려움은 구태여 확인하려고 하지 않아도 예전과 똑같았다는 사실이다. 하기는 장수군의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경제 사정이 나아지리라는 기대 자체가 무리일는지 모른다. 농가 인구가 장수군 전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농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보이고 있었지만, 산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장수군의 전체 면적 가운데 경작이 가능한 농토는 겨우 15% 남짓에 불과하엿다. 그나마도 농토는 장수천, 번암천, 연평천, 장계천, 남천, 요천 등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좁다란 논밭이 게딱지같이 흩어져 있었고, 자연히 농가 당 경지규모가 영세하기 작이 없었다.

 

    면소재지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전만 해도 장수군은 전라북도에서 광산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당시 통계를 보면 장수군에는 모두 열 군데의 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금광이 다섯 군데, 몰리브덴 즉 수연을 캐는 광산이 세 군데, 운모 광산과 석면 광산이 각각 한 군데씩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번암면 소재지에는 금광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광산촌의 경기를 타고 번암면은 다른 지역보다 앞서 전깃불도 일찍 들어오고 동네도 제법 흥성거렸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광산이 문을 닫게 되자, 면소재지의 경기도 썰렁해졌다. 외지에서 흘러 들어왔다가 돈이라도 좀 모은 사람이나 지극히 빈한하게 살던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버리고 돈도 모으지 못하고 오갈 데 없이 농사를 짓던 사람만 주로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이 뒤떨어진 지역적 환경만큼이나 내가 처한 주변의 상황들도 어수선하고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계절은 바야흐로 만물이 새롭게 싹을 틔우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나는 매우 초조해졌다. 앞날에 대한 계획은커녕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아득하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전주고등학교는 시험에서 떨어졌고, 신흥고등학교는 입학을 포기했다. 이제 나로서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책을 펴들긴 했지만 공부가 되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떤 목표가 있어야 하고자 하는 의욕과 의지도 생겨나는 법이다. 목표 없이 무작정 하는 공부란 공연한 공상과 망상을 키우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신흥고등학교 입학을 괜히 포기했나 하는 객쩍은 후회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남원농업고등학교가 한 학급을 증설하게 되어 추가로 3차 입학시험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귀가 솔깃했다. 농고에 진학하여 체계적으로 영농 기술을 익힌다면 어려운 집안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어차피 새 학기가 시작되면 동생 춘근이도 남원으로 가야 하니까 그것도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다. 이모저모 앞뒤를 따질 것도 없이 나는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쳤다. 그리고 합격을 했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만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로 남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거 중학교 시절보다 훨씬 혹독한 세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자명하였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나 혼자의 몸이었지만, 이제는 홑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춘근이와 굶어도 같이 굶고 먹어도 같이 먹어야 하는 그런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더욱이 중요한 것은 나는 형이고 춘근이는 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남원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아버지께서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도 그랬다.

 

    “어쨌든 네가 형님이니까 춘근이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굶기든 먹이든 네 능력껏 하고 잘 가르쳐야 한다.”

 

    우리 집안 살림에 두 명 모두를 진학시키는 일은 듯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고집스레 우겨서 동생을 중학교에 보내는 것이므로 단단히 알아서 책임을 지라는 말씀인 것이다.

 

    1952 3월 어느 날, 우리 두 형제는 초라한 책 보따리 하나씩과 보리쌀, 감자, 김치 꾸러미들을 나눠 들고 집을 나섰다. 태령을 넘어 남원으로 옮기는 발걸음은 내가 들고 있던 김치 단지만큼이나 무거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