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가난살이의 합격통지서

 

가난살이의 합격통지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타고난 궁핍함은 어린 나에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며칠 뒤, 터덜터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학교로 갔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자 반색을 하며 맞아주셨다.

 

    “여어, 재식이구나. 너 합격했더라.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담임선생님이 건네는 축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대답 대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들짐승, 날짐승에 이리저리 쫒기면서 태령의 그 험한 산길을

맨발로 넘고 또 넘기를 6,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시냇물을 마시고,

산열매를 따먹으며, 생가재를 잡아먹기를 또 그만한 시간만큼 했다.

그런데 그 모진 고생의 결과가 그 합격통지서 한 장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너무 어이없고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실지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합격통지서이니 오죽했으랴.

 

    나의 이런 상심함을 눈치 채셨는지 담임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하셨다.

재식아, 용기와 희망을 가져라. 올해 입학하지 못하면 어떠냐?

내년도 있고, 또 후년도 있고‧‧‧‧‧‧그러니까 그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야.

배움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설사 중학교에 안 가면 어떠냐?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 꼭 많이 배워야만 한다는 법칙은 없어.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느냐가 더욱 중요한 거야.”

 

    “아닙니다. 저는 꼭 중학교에 들어가고 말 겁니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내미는 남원중학교 합격통지서를

나꿔채듯 받아들고 한달음에 학교를 뛰쳐 나왔다.

선생님 말씀도 옳기는 해. 그러나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중학교에 가고 말 거야. 여기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어.

자칫하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나는 꼭 중학교에 가야 돼.”

 

    나는 백 번, 천 번을 더 되뇌며 태령을 뛰어 넘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중학교에 진학해야 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돌부리에 채였는지 발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의식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는지 모르겠다.

 

    “재식이, 쟤 왜 저러지?”

무슨 일이 있나 봐.”

부쩍 말수가 줄어들고, 통 웃지도 않는 나를 바라보며

동네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의아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슬퍼도 내색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가난인 것이다.

 

    장한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으로 지내던 무겁고 침울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그때의 뼈저린 낙망(落望)스러움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검소, 절약, 근면을 거의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솔선하여 실천하고 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마치 열병을 앓듯 나는 몹시 앓아 누웠다.

세상만사가 모두 귀찮기만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누워 몇 날 며칠을 보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남원중학교 입학 등록 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나는 비척거리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재식아.”

아버지의 입에서 언뜻 약주 냄새가 풍겨 나왔다.

중학교가 꼭 그렇게 가고 싶으냐?”

‧ ‧ ‧ ‧ ‧.”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도 비장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치자. 그러면 학교는 어떻게 다닐 작정이냐?”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귀가 번쩍하여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알았다. 오늘 우리 집에 한 마리뿐인 소를 팔았다.

내일 남원에 나가서 중학교 입학 등록을 하도록 해라.”

오 하나님.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나는 우리 집 재산목록 제1호인 소를 팔았다는 애석함보다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만 앞섰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소가 없어 농사짓기가 힘들겠습니다만,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성공하여 꼭 보답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밤이 새도록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도대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청운(靑雲)의 꿈을 꾸었다 지웠다

하는 사이에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남원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다 말고

외양간을 쳐다보니 미상불 그곳이 텅 비어 있었다.

비로소 나는 그때서야 소 없이 지을 농사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용단에 문득 콧등이 찡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