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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어린 시절

어린 시절

 

    나는 1934년 음력 728, 이 같은 오지의 산간벽지에서 42녀의 3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민족은 남의 나라 손아귀에 들어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 있었고, 게다가 궁벽한 산골에서 태어났으니 가난은 어쩔 수 없이 내가 타고난 운명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없는 집들이 그러하듯, 42녀의 우리 형제자매 말고도 조부모님, 형수, 조카에 이르기 까지 모두 14명의 식구들이 척박한 논밭 10마지기에 목을 매고 살아야만 했으니,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하고 궁핍했을지 짐작이 가도도 남을 것이다.

 

    더욱이 이곳은 고지대인 데다 분지라는 위치적인 불리함 때문에 일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그래서 벼를 심어도 크게 거둘 게 없었으며, 벼가 여물다가도 그대로 서리를 맞은 듯 뻣뻣하게 말라 죽어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로 땅에서 솟아 나오는 물을 받아서 농사를 짓는 생수받이 논이었으므로, 소백산맥의 깊고 깊은 냉기가 서린 물이 흘러드는 바람에 수확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이는 아마도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 대다수가 겪어야 했던 민족의 수난사이기도 했을 것이다.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여 농사를 지어 놓으면 주재소에서 사람이 나와 공출이라면서 탁탁 털어갈 때의 기억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주재소 직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며 통사정을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바로 이러한 참상은 일제시대 우리의 말과 글, 식량, 심지어 밥그릇과 숟가락까지 다 빼앗겼던 식민지 생활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태산보다도 높다는 보릿고개가 되면 먹고 사는 일이 더욱 난감해졌다. 그나마 있던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도 않았으니 음력 4,5월쯤의 춘궁기를 넘기는 일은 그야말로 태산을 넘는 일보다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냥 배를 주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무엇이든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혹시라도 들판의 쑥을 캐다가 강냉이가루에 버무려 쪄먹는 쑥버무리는 아주 고급요리에 속했다. 칡뿌리, 소나무 껍질 등 먹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나무 껍질을 먹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소나무 껍질을 씹다 보면 질긴 부분이 남게 되는데, 그것마저도 아쉬워 그냥 그대로 삼키는 바람에 항문이 꽉 막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변을 제대로 볼 리가 없으니 몸이 퉁퉁 부어오르게 마련이다, 그러면 급기야 꼬챙이로 항문의 소나무 껍질을 파내고 일을 보고 나서야 겨우 살아날 수 있었으니, 주변으로 항상 푸른 나무와 산이 펼쳐져 있다고 해도 내 눈에는 언제나 노랗게만 보일 따름이었다. 영양실조로 인한 현기증으로 눈 앞에 별이 보이는 듯 어찔어찔하여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던 시절이었다.

  

   또한 고지대이면서도 웬 모기가 그렇게 극성을 부렸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위생이고 청결이고 찾을 계제도 아니었지만, 모두 다 한결같이 영양이 부실한 허약한 몸이었던 까닭에 몇 번만 모기에 물렸다 하면 십중팔구는 말라리아에 걸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렇다고 쓸 만한 약이 이었던 때도 아니었으므로 별 수 없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다시 저승에서 이승으로 여름 내내 오락가락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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